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현종(고려)/생애 및 업적 (문단 편집) === [[출생의 비밀]] === 현종의 아버지 [[안종(고려)|왕욱]]은 [[왕건]]의 8번째 아들이며 그의 어머니(즉, 현종의 친할머니)는 [[신라]] [[경순왕]]의 [[큰아버지]] [[김억렴]]의 딸인 [[신성왕후]] 김씨였다. 신성왕후에 대해서는 합주(지금의 [[합천]])의 군수를 지냈던 태위(太尉) 이정언(李正言)의 딸이고, 성은 이씨라고 적은 김관의(金寬毅)의 《왕대종족기》기록도 있다. 해당 서책은 현전하지 않고 《[[삼국유사]]》에 인용된 내용인데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에서 안종 왕욱을 신라의 외손이라고 한 사론이 맞으며, 신성왕후는 김씨라고 보았다. 이에 대해 고려 말의 대학자 이제현은 >"김관의ㆍ임경숙(任景肅)ㆍ민지(閔漬) 세 사람의 글에서는 모두 '대량원부인(大良院夫人) 이씨(李氏)는 태위 정언의 딸로서 안왕(安王, 안종)을 낳았다'고 하였는데 어디에 근거한 말인지 알 수 없다." 고 했다. 《고려사》에는 태조의 후궁 중 한 명으로 합주 사람 이원의 딸인 후대량원부인 이씨가 기록되어 있기는 하지만 대량원부인에 대해서는 《[[고려사절요]]》 및 《[[동국통감]]》에 이름만 등장한다. 하여튼 이래저래 족보가 꼬인 현종이다. 위에서 언급했듯 현종은 고려 황실과 신라 황실의 핏줄을 모두 가진 매우 고귀한 혈통의 소유자였다. 그런데 문제는 현종이 '''아버지 왕욱과 어머니 [[헌정왕후]]가 일단 숙부와 조카라는 근친 관계였으며 심지어 정식으로 혼인도 안한 상태에서 [[사생아|사통을 하여 태어났다는 것이다]]'''. 사실 고려 황족들은 정권 초기에 정치적인 이유로 이복남매끼리 혼인할 정도로[* 동서양을 통틀어 [[근친혼]]의 사례는 꽤 많지만 남매간의 결혼은 [[고대 이집트]]와 고려 이전의 [[신라/왕실|신라 왕실]]을 제외하면 거의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금기시되었다.] 근친혼을 적극적으로 장려했기 때문에 숙부-조카 간의 관계 자체는 큰 문제라고는 볼 수 없었다. 고려의 여러 임금들 역시 과부를 후궁으로 들이기도 했고, 애초에 고려 문화권에선 재가 또한 비교적 자유로웠기에 재혼 또한 큰 문제가 아니었다. 진짜 문제는 헌정왕후가 선왕 [[경종(고려)|경종]]의 왕후이자 현 임금인 [[성종(고려)|성종]]의 여동생으로서, 고려 왕실 내에서도 지체 높은 신분을 가진 여인이었는데 정식 혼인을 하지 않은 채 삼촌과 사통했다는 것이었다. 한 마디로 '''선왕의 왕후가 숙질간의 [[근친상간]]으로 [[사생아]]를 낳은 게 문제였다.''' 그야말로 [[막장 드라마]]에서나 나올법한 일이 현실에 구현된 셈. 덧붙여 현종은 그 전까지 있었던 [[근친혼]]에다 친부모가 서로 숙질관계인 점 때문에 친척 관계가 무척 꼬인다. '''아버지는 태조 왕건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태조 왕건의 손녀'''이기 때문에 현종이 대량원군이던 시절 재위하던 왕들과의 관계가 심히 복잡하다. 먼저 성종의 경우 모계로는 어머니 헌정왕후가 성종의 친여동생이기에 성종의 외조카이지만, 부계로는 아버지인 안종이 성종의 숙부이기에 성종의 사촌동생이 된다. 목종은 더 복잡한데 모계로는 어머니가 목종의 어머니 헌애왕후(천추태후)의 친여동생이여서 목종의 이종사촌 동생이지만, 부계로는 어머니가 자신과 같은 [[항렬]]인 사촌누나이고, 목종의 [[당숙]]이 된다. 그러므로 사촌 누나이자 이모 [[천추태후]]의 남편 경종은 현종에게 사촌형 겸 이모부이며, 생모 헌정왕후는 어머니 겸 사촌 누나가 된다. 또한 외할아버지 [[대종(고려)|대종]]은 큰아버지이기도 하고. 그리고 할아버지인 [[태조(고려)|왕건]]의 경우 현종의 외증조부이자 외외증조부(어머니의 외할아버지)가 되기도 한다. 훗날의 일이지만 사촌형이자 외삼촌인 성종의 2비 문화왕후의 딸은 현종의 1비 원정왕후이고, 성종의 후궁 연창궁부인의 딸은 현종의 2비 원화왕후가 되었다. 태조의 손자인 실제보다 한 세대 더 내려간 태조의 증손자 항렬로 취급된 셈. 따라서 성종은 현종의 장인이 되는 셈인데 이 때문에 현종이 태조의 손자 자격이 아닌, 성종의 양자 내지는 사위 자격으로 제위를 계승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그런데 정작 현종의 아들들이자 후계자인 덕종, 정종은 원성왕후 김씨, 문종은 원혜왕후 김씨 소생이다. 원평왕후까지 합쳐서 이 세 명은 신라 왕족 출신의 공주 사람 김은부의 딸들로, 거란의 2차 침입을 피해 [[전라도]] [[나주]]로 피난을 갔던 현종이 개경으로 돌아오던 길에 [[공주]]에서 당시 절도사로 있던 김은부의 집에 하룻밤을 묵게 되었을 때 김은부의 첫째 딸이 현종의 의복을 지었는데, 이것이 인연이 되어 현종이 왕후로 책봉하니 이 사람이 원성왕후이고, 나중에 남은 두 딸도 모두 왕후로 들이니 모두 친자매들이다. 현종은 출생 비화도 꽤 드라마틱하다. 만삭의 헌정왕후가 안종 왕욱의 집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집안 사람들이 뜰에 섶을 쌓고 불을 질렀다. 불길이 한창 맹렬하자 [[성종(고려)|성종]]이 작은아버지이기도 한 왕욱 집에 무슨 일이 벌어졌냐고 빨리 가서 알아보라 하여 연유를 알아보니, 왕욱이 윤리를 어지럽힌 죄를 범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이에 놀란 성종은 '숙부께서 대의(大義)를 범했기 때문에 유배보내는 것이니 애태우지 마십시오'라고 말하며 왕욱을 멀리 사수현(지금의 [[경상남도]] [[사천시]])으로 귀양보내기에 이른다.[* 아마 신라 [[김유신]]이 여동생 [[문명왕후|문희]]를 [[김춘추]]와 결혼 허락을 받기 위해 [[선덕여왕]]에게 벌인 퍼포먼스에서 힌트를 얻어 자신들의 재혼을 성종에게 허락받기 위한 퍼포먼스를 벌인 것 같은데, 성종의 반응이 예상과 달라 큰 낭패를 보게 된 정황으로 보인다.] 소식을 들은 헌정왕후는 큰 충격을 받은 채 집으로 돌아왔는데 문에 이르자마자 산통이 와서 방에서 출산한 게 아니라 문 앞의 [[버드나무]] 가지를 휘어잡으면서 아이를 낳았고 결국 산욕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는 무우수 나뭇가지를 붙잡고 [[석가모니]]를 낳은 뒤 일주일만에 명을 달리한 [[마야부인]]의 설화와 유사하다]고 《고려사》에 기록되었다. 하지만 현종이 세운 현화사비에는 헌정왕후가 이듬해 별궁 보화궁에서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빙성을 따지자면 당대의 1차 사료인 현화사비의 신빙성이 더 높다...가 더 합리적인 추론이겠지만, 현화사비는 그 내용이 (특히 친부 왕욱 관련해서) 《고려사》와 차이가 많이 나서 다소 신빙성을 의심받긴 한다. [[안종(고려)]] 문서 참조. 현종은 출생 후 1년 정도만에 현종은 졸지에 고아 신세가 되었고, [[성종(고려)|성종]]이 보모로 하여금 아기를 기르게 했다. 보모는 아기였던 대량원군(현종)에게 "아빠"라는 단어를 종종 가르쳤다. 그 때문인지 2년 후 성종이 대량원군을 불렀을 때 성종을 보더니 "아빠"라고 불렀고, 또 성종의 무릎 위로 올라와 성종의 옷을 붙잡고 한 번 더 "아빠"라 불렀다고 한다. 이에 성종은 부모없이 자라는 아기의 처지가 너무 가엾어서 눈물을 흘렸고, 아버지와 떨어진 아이의 처지를 불쌍히 여긴 성종은 후에 '대량원군'이라는 작위를 내려 귀양지에서 지내던 왕욱에게 보살피도록 배려해주었다. 그런데 위 내용을 색다른 시각으로 각색해보면, 헌정왕후가 타계하고 궁궐 내에 끈이 떨어진 대량원군이 궁궐 밖으로 내쳐진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막말로 성종 입장에서는 현종이 향후 제위 계승 문제에서 문제만 일으킬 가능성이 있는 아이였기 때문. 성종 본인 슬하에 아들이 없으니 다음 왕위는 천추태후의 아들 목종에게 이어질 수 밖에 없는데 그러한 성종 입장에서 보면 현종은 후계 구도를 망쳐놓을 수 있는 존재였다. 현종을 자신의 양자로 들여도 되겠지만, 출신이 사생아라 잡음이 많겠고 친부를 알려주지 않아야 혼란이 오지 않을 테니 이 역시도 끌리는 선택은 아니다. 다 떠나서 친부랑 같이 살게 하는 것이 인륜적으로 맞기도 하고. 특히 유교적 질서를 지향했던 만큼 부자관계를 억지로 끊어놓는 행위는 더더욱 싫었을 것이다. 어쨌든 현종은 극적으로 부자 상봉에 성공했다. 이때 왕욱은 왕순에게 제왕이 되라는 이야기를 해주었고, 먼 훗날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그 말은 현실이 된다.]] 그러나 부자 상봉의 기쁨도 잠시였을 뿐, 왕욱도 얼마 지나지 않아 현종이 5세였을 때 병사하고 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